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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군묘 및 사당 추천 1
주소 평택시 독곡동 산 53
전화번호 031-610-8608
이용요금 무료입장
이용시간
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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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조선 세조 때에 무관으로 명성이 높았던 최유림의 묘와 그를 모신 사당이다.

세종32년 무과에 급제하여 고성현령(固城縣令) 의금부진무 등을 역임하였고, 세조1년 사직으로서 세조 즉위의 공으로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攻臣) 2등이 되었다. 세조10년(1464) 중추원부사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전라도 처치사(處置使)로 나갔으나 앞서 명나라에 갔을 때 사무역(私貿易)을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지방으로 중도에 부처(付處)되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공현위장이 되어 충청도병 1000여명을 이끌고 석장현 싸움에서 적장 김말손을 사로잡는 등 공을 세워 적개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오위장에 임명되는 한편 수성군에 봉해졌다. 그해 겨울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성종2년(1471) 병을 얻어 고향인 독곡동으로 낙향하여 죽었다. 이에 성종이 슬퍼하며 안양(安襄)이라 시호하고, 자헌대부 병조판서를 증직하는 한편, 진위군 우동에 치장하도록 하며 신도비와 사당을 세워 후손이 받들도록 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이에 수성최씨 안양공파의 맥이 이때부터 이곳에서 이어져가게 되었다.

수성군 사당은 본래 진위현 탄현면 오좌동(현 평택시 독곡동 262번지 대지 47평)에 위치하였고 본관 5평 6홉, 외삼문 2평 5홉의 목조 기와집 형태로 전해오면서 500여년 동안 10여 차례 중수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의 보수가 곤란하여 1979년 문중회의에서 다시 신축하기로 하여 1980년 4월에 철거하고 구 사당 주위의 종중산 182평을 대지로 조성하였으며, 1982년 3월 24일 건축허가를 받아 본관 11평 1홉 외삼문 5평, 담장 110m의 규모로 신축, 이듬해 6월 준공되었다.
현재 건물의 배치는 계단을 20여단 오르면 외삼문(外三門:바깥 담에 세칸으로 세운 문)인 앙충문(仰忠門)과 사당인 수성군사우로 구성되어 있고, 주위의 벽돌 담장은 자로 잰 듯 네모반듯하며 길이는 110m정도 둘러싸여 있다. 수성군 사당은 정면 3칸으로 기단을 쌓은 후 화강석 원형 주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맞배지붕이고 옆에는 방풍널을 달았으며 규모는 11평 1홉이고, 외삼문인 앙충문은 솟을 대문으로 5평이다.
우측에는 최근에 만든 '수성 최씨 시조 수성백 문혜공 휘 영규 육세손 정충적개공신 가선대부 수성군 겸 우위장군 행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휘 유림 행정록'이 있고, 그 뒤로 세워진 신도비는 본래의 것이 마멸되어 없어졌으며, 1972년 3월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른다. 사당 바로 뒤쪽으로 여러 개의 무덤이 보기 편하게 펼쳐져 있는데, 모두 수성 최씨 후손들이라고 한다.

□ 최유림의 생애 (崔有臨:1426~1471)

최유림은 본관은 수성(隋城), 자는 자앙(子昻)이다. 일찍이 학문과 무예에 능통하여, 세종32년(1450) 무과에 급제해 고성현령(固城縣令)을 지내고 세조10년(1464) 중추원 부사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북경을 다녀온 뒤 뇌물사건에 휘말려 한때 파직되었다.
세조13년(1467) 길주 출신의 지방 호족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시애는 함길도 지방에서 재력과 세력을 넓혔던 지방 양반 출신인데, 지리적으로 북방 이민족과 접해있는 특수한 지역인 함길도 지역은 중앙에서 절도사를 파견하지 않고 그 지방의 덕망있는 양반 중에서 지방관을 임명했으나, 세조 즉위 이후 중앙집권제의 하나로 그 지방의 지방관 대신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또 호패법을 강화해 지방민의 이주도 금지하고 국경지대라는 이유로 세금이 적었던 이 지역 호족들에게 이전보다 많은 세금을 내게 되었고, 남도 양반으로 구성된 수령들의 세금 징수 독촉과 부정축재가 심해지자 사회, 정치적 지위를 보장받지 못했던 지방 호족의 불만이 커져갔다. 이시애는 이런 불만에 찬 북도의 호족과 도민의 세력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조정에서는 조석문․허종․남이․강순․어유소 등을 대장으로 삼만관군을 출동시키니, 최유림도 이에 참전하여 북청에서의 두 차례 격전에 선봉으로 대승을 거두어 출병 6개월 만에 승리하여 돌아왔다. 이로써 최유림은 정충출기 적개공신 3등(精忠出氣敵愾功臣三等)이 되었다. 이후 명나라에 이만주(조선건위주의 야인(野人)3대 추장, 조정에서는 이만주에게 우리의 관직을 주어 귀순토록 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고 명에 귀의하여 도지휘첨사의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세종의 토벌정책에 위협을 느껴 홍성으로 거처를 옮겨 세력을 가졌음)가 압록강의 지류인 파서강 유역에서 명의 국경에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으니, 명나라는 조선의 국경지대이므로 이의 평정을 원하였다. 1467년 세조는 대대적인 야인 토벌대를 국경에 보내어, 명과 조선을 어지럽히던 이만주의 본거지를 쳐부술 때 최유림이 토벌대장으로 출병하여 조선군의 위용을 보이며 승리하였다. 이로 인하여 1468년 병조참판 수성군에 봉해지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재임하면서 노략질하는 왜구를 방비하는데에도 큰 활약을 하였다.
성종2년(1471) 8월에 최유림이 돌연 병을 얻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였고, 왕이 어의를 보내 치료하고자 하였으나 백약의 무효로 4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성종 임금은 크게 슬퍼하며 최유림 장군을 자헌대부․병조판서로 벼슬을 높여주고, 수성군의 공덕을 칭송하여 안양공(安襄公)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진위군 우동(牛洞)에 치장(治葬)하도록 하였고, 신도비와 사당을 세워 후손이 기리도록 하였다.

자료출처: 평택문화원 향토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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